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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책 저녁 숲 해가 함석지붕 위에 간신히 걸쳐 있을 때 숲에서는 천년 동안 불던 바람이 탈주를 시도한다 마른가지에 상처 입은 바람이 함석집 마당을 쓸면 건넌방에선 기침 소리가 비듬처럼 떨어진다 서산으로 넘어가지 못한 하루가 문고리에서 짤랑거리고 문풍지로 막아내지 못하는 미친바람은 이부자리로 파고든다 불러도 오지 않던 얼굴들이 천장의 꽃무늬로 번져 있다 낡은 전축 위로 해진 이불 홑청 위로 떨어진다 그리운 얼굴들로 얼룩진 이불은 비벼도 지워지지 않고 삶아도 빠지지 않는다 빽빽하게 서 있는 검은 나뭇가지 끝에 새들이 둥지를 튼다 바람에 묻혀온 기침 소리가 가지를 흔든다 새들은 날아가고 엉성한 둥지는 무너진다 마침내 찢기고 터진 나무의 살들이 부대끼며 타오른다 숲의 열기에 춤추는 어리고 뽀얀 깃털들, 달아난 새들이.. 더보기
詩. 詩人. 詩集. 2017년 1월 26일 - 겨울 물소리가 들려서 잠에서 깨었다. 꿈이 물이 되어 흐르는 것 같았다. 깊은 곳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소리, 해저음. 시는 하나의 해저음이다. 2017년 12월 7일 - 숲에는 나무들이 아직 돌아가지 못한 바람들을 엮어서 겨울 목도리를 짜고 있었다. 국도에서 불어오는 차들이 몰고 가는 바람 소리. 언젠가 그 바람 소리를 들으며 밤을 샌 적이 있었다. 2018년 4월 15일 ... 나는 귤을 쪼갰다. 귤 향! 세계의 모든 향기를 이 작은 몸안에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살아오면서 맡았던 모든 향기가 밀려왔다. 아름다운, 따뜻한, 비린, 차가운, 쓴, 찬, 그리고, 그리고, 그 모든 향기. 아,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가기 전에 나는 써야 하는 시들이 몇 편 있었던 것이다... 더보기
미조항 Mijohang, Namhae - March, 2015 내가 미조리에 가는 이유 지금, 누군가사람 때문에 절망하고 있다면그 사람을 잊어버리면 그만이다.잊어버리는 일이 죽는 일보다 어려우시면궂이 잊으려 말고 그 사람을 사랑하면 그만이다.그래도 사랑하는 일이 죽는 일보다 힘드시면그 사람을 가슴에 품고 죽어버리면 그만이다.그러나 죽기 전에 꼭 남해 미조리에 한번 가 보시라.거기 누구 한 사람 만나게 되면,그리고 죽든지, 말든지 나는 모를 일이다. 오인태 너무나 한적했던 3月의 바닷가,미조항의 어느 횟집 화장실에서 만난 詩 더보기
시월의 숲 Shenandoah National Park, Virginia - October, 2009 10월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한곳으로 모이는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천천히 걸어 들어간다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갑자기 거칠어진다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이 힘들에 쫓기며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 더보기
紅葉 The Butchart Gardens, Vancouver Island - October, 2007 남겨진 가을 움켜쥔 손 안의 모래알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집착이란 이처럼 허망한 것이다그렇게 네가 가고 나면 내게 남겨진 가을은김장 끝난 텃밭에 싸락눈을 불러 올것이다문장이 되지 못한 말들이 반쯤 걷다가 바람의 뒷발에 채인다추억이란 아름답지만 때로는 치사한 것먼 훗날 내 가슴의 터엔 회한의 먼지만이 붐빌 것이다젖은 얼굴의 달빛으로, 흔들리는 풀잎으로, 서늘한 바람으로,사선의 빗방울로, 박 속 같은 눈꽃으로,너는 그렇게 찾아와 마음의 그릇 채우고 흔들겠지아 이렇게 숨이 차 사소한 바람에도 몸이 아픈데구멍 난 조롱박으로 퍼 올리는 물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이재무 가을은 먼지로 남아있는 추억도 그립게 한다. 더보기
American Desert Joshua Tree National Park, California - September, 2012 눈 내리는 날 이곳을 다시 찾고싶다. Desert Places Snow falling and night falling fast, oh, fast In a field I looked into going past, And the ground almost covered smooth in snow, But a few weeds and stubble showing last. The woods around it have it - it is theirs. All animals are smothered in their lairs. I am too absent-spirited to count; The loneliness .. 더보기
살다 어느 담장, 서울 - April, 2012 살다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목이 마르다는 것 나무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눈부시다는 것 갑자기 어느 멜로디를 생각해 내는 것 재채기를 하는 것 당신과 손을 잡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미니 스커트 그것은 플라네타리움 그것은 요한 스트라우스 그것은 피카소 그것은 알프스 모든 아름다운것을 만나는 것 그리고 숨겨진 악을 주의깊게 거절하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울 수 있다는 것 웃을 수 있다는 것 화낼 수 있다는 것 자유라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지금 멀리서 개가 짖고 있다는 것 지금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 지금 어디선가 아기의 첫 울음소리가 터진다는 것 지금 어딘선가 병사가 다치고 있.. 더보기
동백꽃이 아름다운 계절 다니는 회사건물에는 조그마한 안뜰이 있다. 그닥 신경 쓴 조경은 아니지만 나름 분수대도 있고 단풍나무도 있는 곳. 내 책상 옆 창가에는 키작은 동백나무가 있는데 건물들에 둘러싸인 마당이라 해가 그리 많이 들진 않지만 그 작은 나무는 열심히 이쁜꽃들을 피우고 있다. 일하다 고개를 돌려 그 꽃들 보는 즐거움이 크다. 요즘... 동백꽃이 아름다운 계절. 日の目見ぬ 冬の椿の 咲きにけり。 一茶 해를 보지않고도 겨울의 동백나무 꽃 피우는구나. 잇사 5-7-5 의 운율에 맞게 번역을 해보려 했지만 나의 실력으론 역부족. ^^; 계절을, 자연을, 여백의 미를 노래한 하이쿠는 뭔가 정신없이 바쁜 생활속에 좀 쉬어가도 된다는 메세지를 주는 것 같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