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봄날이 지나 가고 있다

서울 - April, 2018

 

 

 

봄날은 간다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착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 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인사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소읍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숙취는 몇 장 지전 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기형도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中


 

 

밖은 봄꽃들이 한창이건만 그런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지난 봄 사진들로 대신 하는 요즘.
서울서 살던 아파트 단지의 벚꽃이 그 동네에선 꽤나 유명해서 집앞을 나가면 분홍꽃들이 하늘에 레이스 차양을 만들어 내곤 했다. 
바람이 살랑 거릴때마다 하늘하늘 춤추며 발등위로 떨어지던 꽃잎들.

당연했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변해버린 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