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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편

그해 여름의 일 여름의 일 - 묵호 연을 시간에 맡겨두고 허름한 날을 보낼 때의 일입니다 그 허름한 사이로 잊어야 할 것과 지워야 할 것들이 비집고 들어올 때의 일입니다 당신은 어렸고 나는 서러워서 우리가 자주 격랑을 보던 때의 일입니다 갑자기 비가 쏟고 걸음이 질척이다 멎고 마른 것들이 다시 젖을 때의 일입니다 배를 타고 나갔던 사내들이 돌아와 침과 욕과 돈을 길바닥으로 내던질 때의 일입니다 와중에도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어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던 때의 일입니다 아니 갈 곳 없는 이들만 떠나가고 머물 곳 없는 이들만 돌아오던 때의 일입니다 잠에서 깨어났지만 한동안 눈을 감고 있는 일로 당신으로부터 조금 이르게 멀어져 보기도 했던, 더해야 할 말도 덜어낼 기억도 없는 그해 여름의 일입니다 박준 中 동해 바.. 더보기
들꽃 작은 들꽃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너나 나나 이 세상에선 소유할 것이 하나도 없단다 소유한다는 것은 이미 구속이며 욕심의 시작일 뿐 부자유스러운 부질없는 인간들의 일이란다 넓은 하늘을 보아라 그곳에 어디 소유라는 게 있느냐 훌훌 지나가는 바람을 보아라 그곳에 어디 애착이라는 게 있느냐 훨훨 떠가는 구름을 보아라 그곳에 어디 미련이라는 게 있느냐 다만 서로의 고마운 상봉을 감사하며 다만 서로의 고마운 존재를 축복하며 다만 서로의 고마운 인연을 오래오래 끊어지지 않게 기원하며 이 고운 해후를 따뜻이 해 갈 뿐 실로 고마운 것은 이 인간의 타향에서 내가 이렇게 네 곁에 머물며 존재의 신비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짧은 세상에서 이만하면 행복이잖니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너는 인간들이 울며불며 갖는 고민스.. 더보기
자작나무를 찾아서 Birch Woods, Inje - October, 2014 자작나무를 찾아서 따뜻한 남쪽에서 살아온 나는 잘 모른다 자작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대저 시인이라는 자가 그까짓 것도 모르다니 하면서 친구는 나를 호되게 후려치며 놀리기도 했지만 그래서 숲길을 가다가 어느 짓궂은 친구가 멀쑥한 백양나무를 가리키며 이게 자작나무야, 해도 나는 금방 속고 말테지만 그 높고 추운 곳에서 떼지어 산다는 자작나무가 끝없이 마음에 사무치는 날은 눈 내리는 닥터 지바고 상영관이 없을까를 생각하다가 어떤 날은 도서관에서 식물도감을 뒤적여도 보았고 또 어떤 날은 백석과 에쎄닌과 숄로호프를 다시 펼쳐보았지만 자작나무가 책 속에 있으리라 여긴 것부터 잘못이었다 그래서 식솔도 생계도 조직도 헌법도 잊고 자작나무를 찾아서 훌쩍 떠나.. 더보기
미조항 Mijohang, Namhae - March, 2015 내가 미조리에 가는 이유 지금, 누군가사람 때문에 절망하고 있다면그 사람을 잊어버리면 그만이다.잊어버리는 일이 죽는 일보다 어려우시면궂이 잊으려 말고 그 사람을 사랑하면 그만이다.그래도 사랑하는 일이 죽는 일보다 힘드시면그 사람을 가슴에 품고 죽어버리면 그만이다.그러나 죽기 전에 꼭 남해 미조리에 한번 가 보시라.거기 누구 한 사람 만나게 되면,그리고 죽든지, 말든지 나는 모를 일이다. 오인태 너무나 한적했던 3月의 바닷가,미조항의 어느 횟집 화장실에서 만난 詩 더보기
감나무 Seoul - October, 2013 감나무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 놓은 붉은 눈물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놓고주인은 삼십년을 살다가 도망 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년인데...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그러기에 봄이면 새순도담장 너머 쪽부터 내밀어 틔워보는 것이다. 이재무 아침마다 보는 동네 감나무.여간 탐스러운게 아니다.詩人은 그렁그렁 매달아 놓은 붉은 눈물이라 표현한 저 감들을 난 출근하다 말고 그 밑에 서서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싶어진다.예전 일본의 카마쿠라라는 동네에 반해버린 이유 중 하나도 바로 감나무들이 많아서였다.언젠가 마당이 있는 집에 살게되면 감나무를 심으리라 작정을 했었는데.. 더보기
섬진강 Hadong, Korea - April, 2013 섬진강 3 그대 정들었으리.지는 해 바라보며반짝이는 잔물결이 한없이 밀려와그대 앞에 또 강 건너 물가에깊이 깊이 잦아지니그대, 그대 모르게물 깊은 곳에 정들었으리.풀꽃이 피고 어느새 또 지고풀씨도 지고그 위에 서리 하얗게 내린풀잎에 마음 기대며그대 언제나 여기까지 와 섰으니그만큼 와서 해는 지고물 앞에 목말라 물 그리며서러웠고 기뻤고 행복했고사랑에 두 어깨 깊이 울먹였으니그대 이제 물 깊이 그리움 심었으리.기다리는 이 없어도 물가에서돌아오는 저녁길그대 이 길 돌멩이, 풀잎 하나에도눈익어 정들었으니이 땅에 정들었으리.더 키워 나가야 할사랑 그리며하나둘 불빛 살아나는 동네멀리서 그윽이 바라보는그대 야윈 등,어느덧아름다운 사랑 짊어졌으리. 김용택 지리산도 섬진.. 더보기
시월의 숲 Shenandoah National Park, Virginia - October, 2009 10월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한곳으로 모이는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천천히 걸어 들어간다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갑자기 거칠어진다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이 힘들에 쫓기며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 더보기
紅葉 The Butchart Gardens, Vancouver Island - October, 2007 남겨진 가을 움켜쥔 손 안의 모래알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집착이란 이처럼 허망한 것이다그렇게 네가 가고 나면 내게 남겨진 가을은김장 끝난 텃밭에 싸락눈을 불러 올것이다문장이 되지 못한 말들이 반쯤 걷다가 바람의 뒷발에 채인다추억이란 아름답지만 때로는 치사한 것먼 훗날 내 가슴의 터엔 회한의 먼지만이 붐빌 것이다젖은 얼굴의 달빛으로, 흔들리는 풀잎으로, 서늘한 바람으로,사선의 빗방울로, 박 속 같은 눈꽃으로,너는 그렇게 찾아와 마음의 그릇 채우고 흔들겠지아 이렇게 숨이 차 사소한 바람에도 몸이 아픈데구멍 난 조롱박으로 퍼 올리는 물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이재무 가을은 먼지로 남아있는 추억도 그립게 한다. 더보기
American Desert Joshua Tree National Park, California - September, 2012 눈 내리는 날 이곳을 다시 찾고싶다. Desert Places Snow falling and night falling fast, oh, fast In a field I looked into going past, And the ground almost covered smooth in snow, But a few weeds and stubble showing last. The woods around it have it - it is theirs. All animals are smothered in their lairs. I am too absent-spirited to count; The loneliness .. 더보기
살다 어느 담장, 서울 - April, 2012 살다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목이 마르다는 것 나무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눈부시다는 것 갑자기 어느 멜로디를 생각해 내는 것 재채기를 하는 것 당신과 손을 잡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미니 스커트 그것은 플라네타리움 그것은 요한 스트라우스 그것은 피카소 그것은 알프스 모든 아름다운것을 만나는 것 그리고 숨겨진 악을 주의깊게 거절하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울 수 있다는 것 웃을 수 있다는 것 화낼 수 있다는 것 자유라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지금 멀리서 개가 짖고 있다는 것 지금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 지금 어디선가 아기의 첫 울음소리가 터진다는 것 지금 어딘선가 병사가 다치고 있.. 더보기
동백꽃이 아름다운 계절 다니는 회사건물에는 조그마한 안뜰이 있다. 그닥 신경 쓴 조경은 아니지만 나름 분수대도 있고 단풍나무도 있는 곳. 내 책상 옆 창가에는 키작은 동백나무가 있는데 건물들에 둘러싸인 마당이라 해가 그리 많이 들진 않지만 그 작은 나무는 열심히 이쁜꽃들을 피우고 있다. 일하다 고개를 돌려 그 꽃들 보는 즐거움이 크다. 요즘... 동백꽃이 아름다운 계절. 日の目見ぬ 冬の椿の 咲きにけり。 一茶 해를 보지않고도 겨울의 동백나무 꽃 피우는구나. 잇사 5-7-5 의 운율에 맞게 번역을 해보려 했지만 나의 실력으론 역부족. ^^; 계절을, 자연을, 여백의 미를 노래한 하이쿠는 뭔가 정신없이 바쁜 생활속에 좀 쉬어가도 된다는 메세지를 주는 것 같다. 더보기
하늘 냄새 진정한 만남은 상호간의 눈뜸 開眼 이다. 영혼의 진동이 없으면 그건 만남이 아니라 한때의 마주침이다. 그런 만남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가꾸고 다스려야 한다. 좋은 친구를 만나려면 먼저 나 자신이 좋은 친구감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친구란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도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런 시구가 있다.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 그 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사람한테서 하늘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는가. 스스로 하늘 냄새를 지닌 사람만이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법정 스님의 '오두막 편지' 中 요즘 因緣 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는데 잠이 안오는 새벽 읽기 시작한 법정스님의 글 중 유난히 가슴에 와 닿았던 구절. 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