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 겨울 詩 둘

첫눈 - December, 2021

 



당신은 첫눈입니까

누구인가 스쳐지날 때 닿는 희미한 눈빛, 더듬어보지만 멈칫하는 사이 이내 사라지는 마음이란 것도 부질없는 것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친 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낱낱이 드러나는 민낯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날 듯 말 듯 생각나지 않아 지날 수 있었다 아니라면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더욱 부질없어질 뻔하였다 흩날리는 부질없음을 두고 누구는 첫눈이라 하고 누구는 첫눈 아니라며 다시 더듬어보는 허공, 당신은 첫눈입니까

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
누군가 어렵게 꺼낸다
끝까지 간 것의 모습은 희고 또 희다
종내 글썽이는 마음아 너는,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어제를 먼 곳이라 할 수 없어
더구나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
첫눈이었고

햇살을 우울이라 할 때도
구름을 오해라 해야 할 때도
그리고 어둠을 어둡지 않다 말할 때도
첫눈이었다

그걸 뭉쳐 고이 방안에 두었던 적이 있다

우리는 허공이라는 걸 가지고 싶었으니까
유일하게 허락된 의미였으니까

저기 풀풀 날리는 공중은 형식을 갖지 않았으니

당신은 첫눈입니까


이규리 <당신은 첫눈입니까> 中



눈 풍년이었던 지난 겨울과는 다르게 이번 겨울엔 눈이 많이 고팠다. 12월 중순께나 되야 펑펑 내린 기다리던 첫 눈. 종묘로 달려가고픈 맘은 굴뚝이었으나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뒷산에 올라 비틀즈의 ‘Norwegian Wood’를 들으며 산책하는 것으로 대신. 그리고 집에 들어 와 시집을 펼쳤다.




밤 슈톨렌




슈톨렌

"건강을 조심하라기에 몸에 좋다는 건 다 찾아 먹였는데 밖에 나가서 그렇게 죽어 올 줄 어떻게 알았겠니"

너는 빵*을 먹으며 죽음을 이야기 한다
입가에 잔뜩 설탕을 묻히고
맛있다는 말을 후렴구처럼 반복하며

사실은 압정 같은 기억, 찔리면 찔끔 피가 나는
그러나 아픈 기억이라고 해서 아프게만 말할 필요는 없다
퍼즐 한조각만큼의 무게로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퍼즐 조각을 수천수만개 가졌더라도

얼마든지 겨울을 사랑할 수 있다
너는 장갑도 없이 뛰쳐나가 신이 나서 눈사람을 만든다
손이 벌겋게 얼고 사람의 형상이 완성된 뒤에야 깨닫는다
네 그리움이 무엇을 만들었는지

보고 싶었다고 말하려다가
있는 힘껏 돌을 던지고 돌아오는 마음이 있다

아니야 나는 기다림을 사랑해
이름 모를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마당을 사랑해
밥 달라고 찾아와 서성이는 하얀 고양이들을
혼자이기엔 너무 큰 집에서 병든 개와 함께 살아가는 삶을

펑펑 울고 난 뒤엔 빵을 잘라 먹으면 되는 것
슬픔의 양에 비하면 빵은 아직 충분하다는 것

너의 입가엔 언제나 설탕이 묻어 있다
아닌 척 시치미를 떼도 내게는 눈물 자국이 보인다
물크러진 시간은 잼으로 만드면 된다
약한 불에서 오래오래 기억을 졸이면 얼마는 달콤해질 수 있다


* 슈톨렌.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매주 한조각씩 잘라 먹는 기다림의 빵


안희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中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먹는 크리스마스 빵 슈톨렌. 럼에 절인 말린 과일들과 마지팬이 들어가는데 빵 표면엔 파우더 슈가를 잔뜩 뿌려 보존을 오래 할 수 있도록 했다. 아몬드 페이스트인 마지팬을 좋아하지 않아 예전엔 그 부분만 도려내어 먹었는데 아몬드 대신 밤 페이스트를 사용하는 빵집을 발견, 그 후론 매년 그 곳에서 사다 먹고 있다. 이번 겨울에도 얇게 썰어 한조각씩 먹으며 (입가에 묻은 파우더 슈가를 털어내며) 크리스마스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