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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 詩 둘

Moss Beach, California - November, 2020



평화로운 산책

저녁 숲길이 별안간 가을을 맞이했을 때 가을, 나를 따라온 긴 그림자 하나 문득 사실적이로구나 시퍼런 가슴도 때로 추억의 철퇴를 맞고 비틀거리는 첨탑들도 일몰 쪽으로 달려간다 이런 시간엔 돌아오는 모든 것들이 눈물겹게 보인다 입술을 적신 새 떼와 손금을 버린 사람들이 돌아오는 시간, 그 시간 끝에 매달려 있는 저 불온한 시계추들 그래, 나는 지금 걷고 있는 중이야

그 길 끝에는 호수가 있다
빨간 닭장과 구름들이 중얼거리며
서쪽으로 가볍게 흘러가고
모든 외마디의 빛깔들이 한끝을 향해
핑핑 글썽이며 돌아오는 시간
노을의 한때를 가로질러
천천히 걸어온 물살들이 가장자리에서
입술을 반짝이네 나 좀 봐, 나 좀 봐

이런 순간에 나는 평화를 평화, 라고 솔직하게 발음해 보는 것이다 내가 지나온 교과서 속에는 아직도 세상의 모든 의미가 세상의 모든 기호들 속에 깃들여 있을 테지만 때로 사람들에겐 살뜰한 알약 하나 꺼내 놓을 수 없는 위독한 행간이 있다 알 수 없는 보퉁이를 싣고 구비를 도는 우편배달부처럼 내게 강 같은 평화 아아, 강 같은 평화 노래 부를 때마다 점점 더 폭력 쪽으로 쓸려 가던,

하여간 나는 지금 걷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날들의 음계를 더듬으며
삭정이 같은 추억이라도 한순간
독하게 끌어안아보는 것이다


류근  <상처적 체질> 中


팬데믹의 첫해였기 때문일까.
인적이 거의 없어 적막했지만 한편으론 평화로웠던 산책길.
일몰시간이라 길게 늘어진 사이프러스의 그림자들을 밟으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따라온 내 긴 그림자를 마주하며 치유의 시간을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Napa, California - November, 2021




다시 가을

구름은 비를 쏟았다
날짜들이 흘러가고
사과나무는 여기저기 사과를 쏟고
마른 나뭇잎 속에서 늙은 거미는
연약하게 댕댕거린다

햇빛이 오래 앉았다 간 자리
바람이 오래 만지작거린 하늘

새들이 날아간다
빈 하늘이 날아가버리지 못하게
매달아놓은 추처럼.


황인숙  <슬픔이 나를 깨운다> 中



기후변화로 봄가을이 많이 짧아졌지만 그래도 다시 가을.
빨갛게 익은 사과가 쏟아지고
마른 낙엽 위로 강아지가 구르고
스웨터와 트렌치코트로 멋을 부리고
공기에 담긴 바람냄새마저 구수한...

내가 사랑하는 계절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