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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詩人. 詩集.

허수경 유고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 (난다, 2019)

 


2017년 1월 26일

- 겨울 물소리가 들려서 잠에서 깨었다. 꿈이 물이 되어 흐르는 것 같았다. 깊은 곳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소리, 해저음. 시는 하나의 해저음이다.

2017년 12월 7일
- 숲에는 나무들이 아직 돌아가지 못한 바람들을 엮어서 겨울 목도리를 짜고 있었다. 국도에서 불어오는 차들이 몰고 가는 바람 소리. 언젠가 그 바람 소리를 들으며 밤을 샌 적이 있었다.

2018년 4월 15일
...
나는 귤을 쪼갰다.
귤 향!
세계의 모든 향기를 이 작은 몸안에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살아오면서 맡았던 모든 향기가 밀려왔다.
아름다운, 따뜻한, 비린, 차가운, 쓴, 찬, 그리고,
그리고, 그 모든 향기.
아,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가기 전에 나는
써야 하는 시들이 몇 편 있었던 것이다.
...

 

잠깐 잠이 들었다 새벽에 깨는 날들의 반복. 다시 잠 들기를 포기하고 글을 읽는다.


많은 문학장르 중에 詩 읽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전국 글짓기 대회에 나가 ‘바람’이란 주어진 시제로 쓴 시가 상을 받아서 인지, 국문학을 전공하신 - 한때의 문학소년- 아빠의 영향 때문인지, 시어 안에 함축된 隱喩로 감추어진 시인의 보물을 캐내는 과정을 즐겨서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난 그저 시를 조용히 소리 내어 읽는 것을 좋아한다.

 

지난달 여행을 온 지인에게 부탁했던 책 두권 중 하나. 허수경 시인의 유고집. 더 이상 치료를 해 줄 수 없다는 병원의 말을 듣고 세상 떠나는 날을 기다리는 사람의 심정을 난 알 수가 없다. 가까운 한 사람이 지금 호스피스에 있다. 난 그녀를 위해 기도밖에 할 수가 없다. 전화기 너머로 밝은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밖에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

창으로 스며드는 새벽녘의 푸르름이 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