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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름 詩 둘

 

 


호우주의보

이틀 내내 비가 왔다

미인은 김치를 자르던 가위를 씻어
귀를 뒤덮은 내 이야기를 자르기 시작했다

발밑으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이
꼭 오래전 누군가에게 받은 용서 같았다

이발소에 처음 취직했더니
머리카락을 날리지 않고
바닥을 쓸어내는 것만 배웠다는
친구의 말도 떠올랐다

미인은 내가 졸음을
그냥 지켜만 보는 것이 불만이었다

나는 미인이 새로 그리고 있는
유화 속에 어둡고 캄캄한 것들의
태(胎)가 자라는 것 같아 불만이었다

그날 우리는 책 속의 글자를
바꿔 읽는 놀이를 하다 잠이 들었다

미인도 나도
흔들리는 마음들에게
빌려온 것이 적지 않아 보였다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中




몇 년째 심한 가뭄에 시달리는 캘리포니아에 살다 보니...

몇 켤레 있는 장화는 신을 일이 없다
우산들은 먼지만 쌓여가고 있다
비 핑계 대고 막걸리 마실 일이 없다
비 내리는 풍경에 괜히 감상에 빠질 일도 없다
비 노래 playlist는 제일 밑에 내려가 있다

好雨가 그립다.



 

 

 

수박

아직도 둥근 것을 보면 아파요
둥근 적이 없었던 청춘이 문득 돌아오다 길 잃은 것처럼

그러나 아휴 둥글기도 해라
저 푸른 지구만 한 땅의 열매

저물어가는 저녁이었어요
수박 한 통 사들고 돌아오는
그대도 내 눈동자,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었지요

태양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영원한 사랑
태양의 산만한 친구 구름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울적한 사랑
태양의 우울한 그림자 비에게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혼자 떠난 피리 같은 사랑

땅을 안았지요
둥근 바람의 어깨가 가만히 왔지요
나, 수박 속에 든
저 수많은 별들을 모르던 시절
나는 당신의 그림자만이 좋았어요

저 푸른 시절의 손바닥이 저렇게 붉어서
검은 눈물 같은 사랑을 안고 있는 줄 알게 되어
이제는 당신의 저만치 가 있는 마음도 좋아요

내가 어떻게 보았을까요, 기적처럼 이제 곧

푸르게 차오르는 냇물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재와 붕장어의 시간이 온다는 걸
선잠과 어린 새벽의 손이 포플러처럼 흔들리는 시간이 온다는 걸
날아가는 어린 새가 수박빛 향기를 물고 가는 시간이 온다는 걸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中




지금과는 무척 상반되게 어린시절의 난 먹는 행위에 그닥 관심이 없었다.
엄마가 그야말로 숟가락을 들고 쫓아다니셨을 정도로 음식에 전혀 욕심이 없었다.
그래도 그 중 잘 먹는 것들이 있었는데
설날 할머니랑 엄마랑 둘러앉아 빚어 먹던 만두, 그리고 무더운 여름 큼지막하게 잘라먹던 수박이다. 그래서 엄마는 날 만두 대장, 수박 대장이라 불렀다.
지금도 만두, 수박을 좋아해서 어디 맛있다는 만두집은 꼭 찾아가 먹어보고
토리노에선 수박 젤라토를 하루에 세 번씩 먹고 방콕에선 땡모반을 매일 찾았다.
詩人에겐 수박이 과거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면 나에게 수박은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인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