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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리스본

2014년 늦봄,
고단했던 서울 생활 중 잠시 숨 돌릴 틈이 생겼을 때, 아트선재의 지하극장에 영화 한 편을 보러 갔었다.
평소 동경하던 도시의 이름이 제목에 들어간 그 영화는 <리스본행 야간열차>였다.

우연한 기회에 손에 들어온 책 한 권으로 일생일대의 일탈을 감행하는 주인공의 여정을 그려낸 영화는 그 모험과 함께 영상 속 리스본의 풍광이 더해져 그 당시 한국에서의 생활을 힘들어하던 나에게 대리만족을 주었었다.


그리고 정확히 10년 후, 소중한 나눔 덕분에 원작인 파스칼 메르시에의 소설을 읽게 되었다.
너무 오래전에 봐서 기억에 가물가물한 탓도 있겠지만 영상으로 접했던 것보다 활자로 읽어 내려간 이야기는 더욱 깊은 떨림으로 다가왔다.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無音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말은 詩가 되고 나서야 진정으로 사물에 빛을 비출 수가 있어. 변화하는 말의 빛 속에서는 같은 사물도 아주 다르게 보이지.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글 속에 음악이 나오면 그 음악을 틀어 놓고 책을 읽는다. 그래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글 속엔 온통 음악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
<리스본행 야간열차>에는 클래식 음악들이 언급되는데 특히 베를리오즈의 음악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책의 저자, 아마데우 드 프라두가 즐겨 들었다고 한다. 그중 가장 맘에 들었던 곡 '오펠리어의 죽음'.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세실리아 바톨리의 아름다운 노래를  계속 듣다 보니 생각나는 그림이 있다. 20여 년 전 갔던 Tate Britain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두 그림 중 하나인 밀레이의 오펠리어.

 

Ophelia (1851-2) by John Everett Millais - 이미지 출처: www.tate.org.uk

 
다른 하나의 그림은 사전트의 Lady Macbeth이다.

Ellen Terry as Lady Macbeth (1889) by John Singer Sargent - 이미지 출처: www.tate.org.uk



우연히도 두 그림 다 셰익스피어 희곡에 나오는 인물들.
 
이렇게 연상놀이를 하며 런던까지 갔다 다시 리스본으로 돌아와 페르난두 페소아의 시집을 집어 들었다. 

 
양 떼를 지키는 사람

굽은 길 저 너머 들려오는
목에 달린 방울 소리처럼,
내 생각들은 기뻐한다.
유일하게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기쁘다는 걸 아는 것,
왜냐하면, 몰랐다면,
기쁘고 슬픈 대신
즐겁고 기뻤을 텐데.

생각한다는 건
바람이 세지고, 비가 더 내릴 것 같을 때
비 맞고 다니는 일처럼 번거로운 것.

내게는 야망도 욕망도 없다.
시인이 되는 건 나의 야망이 아니다.
그건 내가 홀로 있는 방식.



알베르투 카에이루 (페소아의 필명),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中

 


蛇足:
 10년 전 영화를 보면서 놀랐던 것은 리스본이 샌프란시스코와 많이 닮아있다는 사실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 중 하나이다 보니 아마 샌프란시스코가 리스본과 닮았다고 하는 것이 더 논리에 맞겠지만 난 샌프란시스코의 주민이고 리스본은 가본 적이 없으니.

우선 리스본엔 금문교와 똑 닮은 현수교가 있는데 San Francisco의 Bay Bridge를 만든 회사에서 1966년 만든 다리이다. 처음엔 독재자 살라자르의 이름을 따 Ponte Salazar로 불리다가 1974년 카네이션 혁명 이후 Ponte de 25 Abril이라 이름 붙여진 이 다리는 금문교와 같은 Internatioal Orange의 페인트로 칠해졌다. 

Ponte de 25 Abril (左), Bay Bridge (中), Golden Gate Bridge (右) - 이미지 출처: www.kqed.org


리스본은 7개의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라 오르막길 내리막길이 많은데 샌프란시스코도 7개의 언덕으로 구성되어 있다. 심지어 Renzo Piano는 샌프란시스코의 건축물 옥상에 이 언덕들을 상징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California Academy of Science by Renzo Piano


리스본과 샌프란시스코에는 아직도 Street Car와 Tram이 대중교통의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언덕이 많은 도시라서 이러한 교통수단이 특화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Tram in Lisbon - 이미지 출처: www.nationalgeographic.com


샌프란시스코는 City by the Bay라는 별명답게 바닷가와 만으로 둘러싸여 있고 리스본은 바닷가로 흐르는 테주 강의 삼각 하구에 자리하고 있어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풍경이 비슷하다.

이러한 친근감 때문일까? 리스본은 언제나 내 여행리스트 탑에 올라있다.
아직 기회가 없어 가보지 못한 곳.
어쨌든 리스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