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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 詩 둘

눈내리는 밤 - January, 2022



밤의 발자국

저녁내 펑펑 눈 쏟아지고 깊은 밤
보안등 불빛 아래
나무들 분분 꽃 날리고

그네도 벤치도 땅바닥도
하얗게, 하얗게 덮인 놀이터
왔다가 돌아간 작은 발자국

얼마나 기다렸을까
나보다 먼저 다녀간 고양이

황인숙 <내 삶의 예쁜 종아리> 中



몇년 전 우연히 재건축을 앞둔 둔촌 주공아파트 단지내 길고양이들을 위한 뱃지를 산 적이 있다. 올 봄,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2001), <말하는 건축가>(2012)를 만든 정재은 감독이 철거 공사 직전인 2019년 12월까지 2년여 동안 길고양이들의 안전한 이주를 위한 모임 "둔촌냥이"의 활동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고양이들의 아파트>를 개봉했었다. 이 영화를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둔촌 주공아파트의 또 다른 이야기를 담은 <집의 시간들>(2018)이란 다큐를 보면서 오랜 세월, 많은 추억과 정들이 켜켜이 쌓여있는 아파트 단지의 풍경이 아름다워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곳에서 한가로이 자기의 삶을 살아온 많은 길고양이들은 지금도 어디선가 길 위에서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보안책방 - December, 2022



어울린다

너에게는 피에 젖은 오후가 어울린다
죽은 나무 트럼펫이
바람에 황금빛 소음을 불어댄다 너에게는 이런 희망이 어울린다
식초에 담가둔 흰 달걀들처럼 부서지는 희망이

너에게는 2월이 잘 어울린다
하루나 이틀쯤 모자라는 슬픔이

너에게는 토요일이 잘 어울린다
부서진 벤치에 앉아 누군가 내내 기다리던

너에게는 촛불 앞에서 흔들리는 흰 얼굴이 어울린다
어둠의 빛을 아는 인어의 얼굴이

나는 조용한 개들과 잠든 깃털,
새벽의 술집에서 잃어버린 시구를 찾고 있다 너에게 어울리는

너에게는 내가 잘 어울린다
우리는 손을 잡고 어둠을 헤엄치고 빛 속을 걷는다

네 손에는 끈적거리는 달콤한 망고들
네 영혼에는 망각을 자르는 가위들 솟아나는 저녁이 잘 어울린다

너에게는 어린 시절의 비밀이
너에게는 빈 새장이 어울린다
피에 젖은 오후의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들이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中


“너”를 얼마나 많이 겪고 알아야 이렇게 어울리는 것들을 찾아낼 수 있을까.
나에게도 어울리는 것들을 나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